바람이 전하는 예래

나는 바람이다제주 바다를 품고 부는 바람이다. 푸른 섬 대지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검은 화산돌들이 얼기설기 쌓인 밭담을 훑으며 여기, 예래마을에 든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모른다. 내가 이 마을의 풀과 나무를 흔들고 바다 물결을 일으킬 때 아득한 세월을 지나온 열 개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당신을 스칠 때 느껴보라. 2천여 년 전 시작된 예래마을의 이야기를


먼 옛날 불의 땅이었던 제주섬거칠게 뿜어대던 용암의 집들, 368개의 오름그 중 가장 거대한 오름, 군산. 1007, 세상을 삼킬 듯 화산이 터져올랐다. 무섭게 끓어대던 분화가 멈추고 용암이 굳은 땅에 숱한 생명들이 빛을 심고 초원이 펼쳐지기 시작한 때, 담대한 한 마리의 사자가 군산에 들어 정상에 누웠다. 하늘과의 경계를 지운 바다와 그 위로 솟아오른 산방산과 한라산. 하늘 아래 겸손히 엎드린 사람의 집들을 굽어보며 사자는 예래마을로 드는 액운을 막아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사자의 수호 아래, 평온히 밭을 일구고, 바다 일을 해왔다.

군산을 수호신으로 여겨 숭배하고 마을의 본디 모습을 아껴 보존한 마을 사람들에 보답하듯 군산은 하루도 마르지 않는 구시물을 내려 이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가꾸도록 도왔다. 가장 높은 곳 때묻지 않은 생명수를 내렸으니 사람들은 심신 마를 날 없이 온순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 귀한 구시물을 정수그릇에 담아 해마다 비님 오시길 빌었다. 이들의 기원을 받은 하늘이 비를 내리면 애기업개돌은 처량히 젖는다. 나는 기억한다. 아랫마을 한 머슴이 환한 얼굴로 아기를 업고 이곳에 올라왔던 날을장차 나라의 장군이 태어날 거라는 마을의 전설, 자신의 아들이 바로 전설 속 인물이라 확신했던 그는 장군이 가질 보물이 나온다는 농궤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결국 참다못한 머슴은 망치로 농궤를 내리쳤고 그 순간 하늘은 벼락을 내려 가엾은 부자를 돌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천 년이 넘는 세월을 하늘을 인 채 솟아있다. 영원을 사는 부자가 안쓰럽기도 했는지 이따금 하늘이 찬란한 빛을 내려 이들의 실루엣을 더욱 선명히 비춘다.

이젠 전설이 되어버린 그날의 기억이 아련해질 즈음, 군산을 내려와 나는 예래포구로 분다. 예래동 남쪽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이곳에 오면 언제나 생동력으로 기분이 좋다. 아방들은 고깃배를 끌고 바다로, 어멍들은 바다에 밭을 일궈 자식 키우듯 해초들을 기른다. 이들이 일손을 놓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잠잠히 머물며 나는 이때를 기다린다. 진황등대 너머로 석양이 기우는 시간. 아방, 어멍의 생의 물길도 붉은 평온 속에 흔적을 묻는다.

 

어둠 속에 달이 걸린다. 나는 물결 위를 비추는 진황등대의 불빛을 따라 춤을 춘다. 그 부드러운 불빛에 취해 너울너울 바다 위를 달려 사계포구까지 간다. 그곳엔 춘지등대가 진황등대 방향을 향해 빛을 비추고 있다. 나는 이 두 등대가 멀리서 서로를 바라보는 그 눈길이 참 좋다. 바야흐로 1940, 고향 제주를 떠나 일본으로 강제징용을 가 재일교포가 된 강진황 하르방. 그리고 그의 아내 김춘지 할망. 부부는 고향 사람들이 뱃길을 나갔다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며 자신들의 고향인 예래동과 사계리에 두 등대를 세워주었다. 그래서 언제나, 떠도는 내게도, 먼길 나간 아방들에게도 진황등대 불빛은 푸근한 보살핌 같다.

날이 밝자 파도 소리에 아이들 웃음소리가 실려 온다. 여름이면 이곳은 까르르 아이들의 소리가 돌담을 넘는다. 제주는 예부터 빗물이 지하로 흐르다가 암석이나 땅 틈새로 솟아나는 용천수에 따라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물을 마시고, 또 농사에 이용했지만 이곳 예래마을 용천수는 바다와 너무 가까워 그냥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이를 놀고 있는 물이라 하여 논짓물하고 불렀다. 그런데 몇 해 전 제주의 검은 돌들을 쌓아 천연 풀장을 만들었다. 눈앞에 바다를 펼쳐두고 세상 가장 행복한 얼굴로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 예래마을은 뜨거운 한때 동심에 젖는다.

나는 햇볕에 그을리는 아이들의 피부를 식혀주며 놀다가 파도 소리와 멀어져 대왕수천으로 향한다. 예래마을 젖줄인 이곳은 참게와 은어, 미꾸라지가 살고 있는 고운 물을 가졌다. 그리하여 가마우지와 백로도 둥지를 틀고 들어앉았다. 비가 오지 않으면 말라버리는 용천수,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대왕수천의 물줄기가 마른 때를 본 적이 없다. 대왕수천을 따라 흐르듯 불다 보면, 사시사철 그치지 않는 물소리에 마음이 청아해진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산책하길 좋아한다.

예래마을에는 반딧불이가 좋아하는 산책로도 있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녀석들은 천연기념물로 귀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몇 해 전에는 한국반딧불이연구회라는 곳에서 이곳 예래천을 반딧불이 보호지역 1호로 지정을 했다. 예래천이 청정함을 잃지 않은 덕에 예나 지금이나 나는 변함없이 반딧불이들을 만나오고 있다. 특히 맑은 날 밤이면 이곳을 찾아 녀석들의 군무를 감상하곤 한다.

유독 연인들이 사랑하는 산책길도 있다. 내가 왈츠 추듯 부드럽게 부는 날은 이곳 갯깍주상절리대에 손을 맞잡은 연인들이 맨발로 몽돌을 밟기도 한다. 그들의 배경엔 거대한 시간의 역사가 서있다. 나는 보았다. 아득한 옛날, 성난 용암이 붉게 흘러 이 자리에 식어 굳어지는 모습을.. 깎아지른 벼랑으로 서있는 이 암석기둥은 당시의 위엄을 잃지 않고 여전히 강직하기만 하다. 나는 주상절리의 속살을 수직으로 훑어 오르며 그 위엄을 맛보길 즐긴다. 연인들도 오랜 세월 굳건한 이 암석기둥 앞에서 변하지 않을 사랑을 약속하곤 한다.

연인들의 사랑의 약속에 취하고, 몽돌을 부딪는 파도소리에 취해 해변을 거닐다 보면 문득 모든 소리가 고요 속에 드는 바위굴이 나타난다. 영원히 견고할 것만 같던 주상절리도 한결 같이 들이치는 파도의 두드림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자신의 속을 비워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선사시대 사람들은 이곳에 유물을 남겼다. 덕분에 나는 이 속이 빈 바위굴인 들렁궤를 자유롭게 드나들게 되었다. 빛과 어둠, 소리와 고요의 대비, 쏟아져 내릴 듯한 속살을 보고 있자면 신의 숨결이 이러할까 싶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곳에 들어 큰 숨을 쉰다. 광활한 바다를 향해 조였던 마음을 풀어놓고, 활처럼 휜 중문진모살해변의 품으로 든다. 백사장을 거니는 이들은 어느새 보드라운 모래에 시름겨웠던 마음을 내려두고 무언의 위안을 받는다. 나는 이곳에 이르러 진모살(모래)에 몸을 비비며 여독을 푼다.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흑백적회색의 모래알. 예전 중문해변 바다 속을 그득히 채웠던 비단모시조개가 고운 모래로 변해가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지금, 중문진모살해변은 전국 가장 깨끗한 해변으로 남아 세계인의 발길을 붙든다.

자연의 손길이 지난 자리, 그 본래의 예래마을을 존중하는 주민들을 나는 사랑한다. 또한 한국의 섬, 있는 그대로의 제주를 사랑하는 그대들을 언제나 기다린다.